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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혁신

학교 안에서는 왜 교사가 수업 성장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가?

by 김현섭 2014. 3. 3.

20123월 교육방송국(EBS)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 연락을 받았다. ‘선생님이 달라졌어요담당 작가였는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수업 코치로 활동해주길 바랬다. 평상시 해당 프로그램을 유의깊게 보았던 시청자이었기에 망설임없이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1년 동안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면서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1년 동안의 수업 코칭 과정을 통해 해당 선생님들이 변화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수업 혁신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처음 내가 가졌던 호기심은 과연 어떠한 선생님들이 이 프로그램에 신청하는가?’ 였다. 왜냐하면 나라면 아무리 수업하기 힘들어도 전 국민 앞에서 내 수업을 공개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장점 뿐 아니라 단점도 공개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업 코칭 신청자들을 인터뷰해보니 신청자들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다. 한 유형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노력을 했지만 원하는 대로 수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절발하게 신청한 선생님들이었고, 다른 유형은 수업을 잘하는 선생님들인데, 수업 코칭을 통해 더 수업을 잘하길 원해서 신청한 선생님들이었다. 수업 코칭 신청 이유와 수업 수준은 다르지만 두 유형의 공통점은 교사가 수업을 통해 성장하고 싶다는 것이다. 교사라면 누구나 수업을 잘하고 싶어한다. 모든 교사는 수업 성장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수업 성장에 대한 의지와 욕구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수업을 잘하기 위해 방송국까지 와서 전 국민 앞에서 자신의 단점을 노출하는 창피함을 무릎쓰면서라도 수업 코칭을 받아야 하는가? 학교 안에서는 수업 코칭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가? 왜 학교 안에서는 교사가 수업 성장할 기회를 자주 갖지 못할까? 교사가 학교 안에서 수업 성장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수업코칭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가지게 된 질문이었다.

수업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게 되면?

수업 시간에 아이들을 만나도 별 느낌이 없다.

수업 내용과 관련하여 아이들이 질문하면 귀찮다.

교실에 늦게 들어가고 빨리 나온다.

진도만 빨리 나갔으면 좋겠다.

이러한 자각 증상이 나타났다면 내 수업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첫 수업을 되돌아 보면 설레임과 두려움 등 다양한 감정이 교차되면서 밤새워 열심히 수업을 준비한 경험이 기억난다. 첫 수업의 감격과 느낌은 교사라면 누구나 잊지 못한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새내기 교사 시절에는 교사의 업무 중 제1의 우선순위가 수업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수업을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수업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여 수업을 준비한다. 그런데 4-5년 정도 교직 경력이 쌓이게 되면 예전보다 수업 준비를 하지 않아도 수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동일한 교육과정을 1번 이상 가르치게 되면 교사 나름대로 경험과 자신감이 쌓이게 되기 때문이다. 일명 분치기 수업내지 버퍼링 수업이 가능해 진다. 분치기 수업은 수업 시간에 닥쳐서 짧은 시간 안에 수업 준비를 해서 수업을 하는 것이고 버퍼링 수업은 수업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수업 시간에 들어가서 수업 준비와 수업 진행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치기 수업이나 버퍼링 수업 형태로 교사가 수업을 진행해도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문제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누군가 불쑥 수업 시간에 들어와도 특별한 하자를 찾아내지 못한다. 예전 만큼 수업 준비가 충분하지 않아도 수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 업무 우선 순위 중 수업에 대한 우선순위는 점차 뒤로 밀려난다. 그러다보면 교사가 자기 수업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게 되고 자기 수업이 문득 재미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교사가 자신의 수업이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교실 아이들도 해당 수업이 재미없다는 것을 경험한다. 교사가 자기 수업이 재미있다고 느껴져야 아이들도 수업이 재미있다는 것을 느낀다. 교사가 자신의 가르침에서 행복감을 누리지 못하면 아이들도 배움에서 행복감을 누리지 못한다. 예전 수업과 비교하여 특별한 외형적인 변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도 그것을 잘 알아차린다.

교사 내면 속에 있는 수업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게 되면 그 빈자리를 공허함과 무기력이 채운다. 수업을 하긴 하는데 그리고 그것이 특별한 외형적인 문제점이 노출되지는 않지만 수업을 하고 나서 힘이 빠져 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교사는 수업을 통해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데, 오히려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만 경험한다. 어떤 교사가 수업 시작 종이 울려도 한참 만에 교실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면 자기 수업 속에서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많은 교사들이 수업 속에서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피로감과 두려움 때문이다. ‘교사 상처의 저자 김현수 선생님은 교사의 내면적인 상처를 데이비드 말란이 이야기한 스몰 트라우마의 개념을 활용하여 이를 설명한다. ‘스몰 트라우마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큰 사건이나 사고가 아니라 주로 대인 관계, 특히 부모나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서적 문제들에 대한 균형이 깨지고 회복되지 않아서 생기는 작은 충격과 외상들이다. 학교 안에서 교사가 경험하는 상처의 원인은 주로 스몰 트라우마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교사는 학교 안에서 많은 피로를 경험하는데 이를 수업 피로, 공감 피로, 학교 피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수업 피로란 수업을 하면서 경험하는 피로감이고 공감 피로란 교사가 아이들을 만나서 감정을 공감하는데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이고 학교 피로란 학교 행정이나 학교 관리자나 동료 교사와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피로감이다. 피로 누적에다가 관계 속의 상처가 겹쳐지게 되면 만성적인 무기력감을 경험하게 된다.

파커 파머에 의하면 수업 속의 두려움은 지식, 학생, 교사 자신의 상처 등을 통해 나타난다. 가르치는 지식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면 교사는 수업의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예상하지 못한 학생들의 무례한 행동 등으로 인하여 교사는 상처를 받는다. 또한 교사 내면의 상처나 한계로 인하여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수업 속의 두려움과 상처가 가중되면 무기력한 모습으로 발전한다. 학생들만 학습 무기력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도 학습된 수업 무기력에 빠진다. 수업 속에서 교사가 경험하는 무기력은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생긴다. 수업에 잘 집중하지 않는 아이들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새로운 수업 시도에 대하여 학생들이 잘 따라오지 않는 경우, 학교 관리자의 반대나 주변 동료 교사들의 조롱을 통해 수업 개선의 의지가 꺾이는 경우, 입시 위주의 수업 풍토나 수직적인 교직 문화 등의 제도적인 한계 앞에서 절망하는 경우 등등.

수업 무기력에 빠진 교사는 투사나 의도적인 거리 두기의 모습이 나타난다. 수업을 잘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힘든 교실 현실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을 껴려한다. 그래서 수업이 힘든 모든 이유는 학생이나 학교 여건 및 교육 환경 등 외부적인 요인으로만 본다. 자신은 최선을 다하지만 주변 여건이 문제가 많다는 식으로 자기를 정당하려는 것이다. 또한 학생들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정 간격을 두고 학생이나 동료 교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떤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이야기할 때 1:1 상황에서도 깍듯이 존칭이나 경어를 사용한다. 그 이유는 존칭이나 경어 사용을 통해 학생들로 받을 상처를 예방하고 적당한 거리 두기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기력이 지속되면 그 다음은 냉소주의로 빠진다. 소극적인 냉소주의는 회피나 무관심 형태로 나타난다. 회피란 평상시 하던 일에 비해 분량을 줄이는 것이다. 그래서 담당 수업 시수를 적게 담당하려고 하거나 수업 시수가 적은 학년을 담당하려고 애쓴다. 담임 교사가 되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한다. 무관심이란 수업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의도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교사가 수업은 하지만 더 이상 교사의 마음 속에 학생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잠을 자거나 딴 짓을 해도 특별히 제지하지 않고 방치한다. 학생들의 배움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적극적인 냉소주의에 빠지게 되면 주변 동료 교사들이 열심히 수업 준비하는 모습을 발견하면 비웃거나 조롱한다. 그래서 다른 교사들이 열심히 수업 준비하는 것에 대하여 격려하기 보다는 부정적인 언어로 오히려 힘을 빼앗아 버린다. 그런데 자신의 그러한 언행이 다른 교사들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지를 정작 자신은 잘 깨닫지 못한다. 냉소주의에 빠진 교사의 수업은 수업 분위기가 냉랭하고 교사와 학생과의 신뢰있는 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 이러한 수업은 교사와 학생과의 상호작용은 일어나지만 정서적 교감과 지식을 통한 삶의 소통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냉소주의 단계가 지나치면 분노나 폭력적인 권위 형태 등으로 표출된다. 개인적으로 교원능력개발평가에서 좋은 못한 결과를 가진 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는데, 대부분 해당 교사들은 분노 상태에 있었다. 분노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나쁜 감정을 말한다. 분노는 때로 수업 속에서 폭력적인 권위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별일도 아닌데도 학생들에게 화를 자주 내거나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학생을 대한다.

 

학교는 수업 잘하는 교사를 원하지 않는다!

학교가 원하는 교사는 수업을 잘하는 교사가 아니라 행정을 잘하는 교사이다. 고경력 교사일수록 승진에 대하여 고민한다. 나이가 들수록 수업하기 힘들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에 승진 문제에 대하여 고민할 수 밖에 없다. 현행 교장 승진제에서는 수업을 잘한다고 교장으로 승진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현행 근무평정제에서는 행정을 잘 수행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 수업을 잘하는 교사는 교직 문화 속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한다. 최근 수석교사제가 생기면서 수업 잘하는 교사에 대한 제도적인 배려가 생겼을 뿐이다. 교사를 평가하는 기준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교사의 3대 업무는 수업, 생활지도, 행정이다. 그런데 수업과 생활지도를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평가하기 쉽지 않다. 그에 비해 행정 능력은 보직 역할, 보직 기간, 업무 수행 능력 등을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비교적으로 평가하기 쉽다. 그러므로 근평에서 좋은 점수를 얻으려면 수업과 생활지도보다는 행정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서 고경력 교사일수록 수업보다는 행정에 많은 에너지를 투입한다. 업무의 우선순위가 행정 > 생활지도 > 수업이 된다.

그렇다면 학교는 교사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행정 능력을 1순위로 평가하는가? 우리나라 교육체계는 교육부 교육청 단위학교의 관계가 수직적인 형태로 있다. 좋은 학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학생이나 학부모의 인정보다 학교 평가 주체인 상급 기관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 교육청이 단위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은 교육청 시책 사업을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했는지로 평가한다. 교육청은 행정 기관이기 때문에 학교에게 요구하는 것은 행정 능력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단위학교의 행정 중심 문화를 혁신하기 위해서는 기존 교육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단위학교가 상급기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의 눈치를 보게 되어야 진정한 학교 문화의 혁신이 이루어질 수 있다.

 

개인주의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다.

대개 사람들은 이기주의는 부정적으로 보지만 개인주의는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내 할 일을 알아서 하는 것이다. 과연 개인주의가 바람직한 것인가? 현재의 교사 문화는 개인주의 문화이다. 그래서 주어진 자기 업무에만 충실하고 다른 동료 교사나 부서 업무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수업 준비도 학교 내에서 동 학년, 동 과목 교사들끼리 함께 하지 않는다. 수업 준비는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초등학교 학년협의회에서는 행정과 생활지도 문제는 다루어도 수업 문제를 안건으로 다루지 않는다. 중등학교 교과협의회에서도 수업 계획, 진도 점검, 수행평가 기준안 협의는 해도 실제적인 수업 내용이나 방식에 대하여 함께 준비하거나 협의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인디스쿨 사이트에 들어가 수업 자료를 다운받아도 옆 반 선생님 자료를 공유하지 않는다. 교무실에서 동교과 선생님이 옆자리에 앉아있어도 수업 자료를 나누거나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수업 속의 고민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나 같은 고민을 가진 교사들끼리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나누지 않는다. 쉬는 시간에도 주변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수다로만 여기고 용건만 간단히 대화한다. 대부분 교무실에서 개인 컴퓨터를 열어놓고 무언가 열심히 작업을 한다. 동료 교사가 교실에서 힘든 일을 경험해도 어떤 이유로 아파하는지 파티션(칸막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개인주의 문화는 다른 교사들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지만 다른 교사들의 고통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과연 개인주의는 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