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쟁이?
인간은 모방하는 동물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투 등에 영향을 따라서 익히기 때문이다. 모든 행동은 모방(模倣)으로부터 시작된다. 1980년대 초 앤드류 멜초프 박사는 아기들이 모방 능력을 타고난다는 점을 발견했다. 태어난 지 며칠 밖에 지나지 않은 아기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어른의 얼굴 표정을 따라했고, 심지어 어른의 손가락 동작도 따라했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몸짓, 표현, 버릇을 따라하는 것을 ‘카멜레온 효과’(chameleon effect)라 부른다. 주변 사람들의 행동에 따라 그때그때 마다 행동을 바꾸어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아기만 모방 심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모방 심리를 가지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하기도 한다. 특정 연예인의 패션과 행동을 따라하기도 하고 심지어 극악한 범죄자의 범죄 행동도 모방 범죄를 일으키기도 한다.
모방은 특정 개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집단 문화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를 사회 심리학에서는 동조 현상이라고 말한다. 동조 행위란 주위의 사람들이 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따라하는 행위이다. 유행을 따르는 것, 친구따라 강남가는 것, 유유상종을 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역할 모델(Role model)은 어떤 한 사람을 정해, 그 사람을 표본으로 정하여 성숙할 때까지 모델로 삼는 것을 말한다. 즉, 자기에게 본보기가 되거나 닮고 싶은 사람을 말한다. 또한 자기의 직업이나 업무, 역할의 본보기가 되는 대상을 역할모델이라고 한다. 역할 모델을 선정하면 서서히 그 사람을 닮게 되고 생각도 비슷하게 된다. 그래서 역할 모델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지침이 된다.
수업자 역할 모델
수업자로서의 다양한 역할 모델들이 존재한다. 그 역할 모델이 무엇인가에 따라 수업 시간의 교사의 역할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Y교사는 3년 동안 육아 휴직하다가 복직한지 얼마 안되는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이다. 30대 후반으로 늦게 결혼해서 슬하 자녀는 3살, 5살의 자녀가 있다. Y선생님은 학교에서 담당 학생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한다. 그래서 학생들도 선생님을 매우 좋아한다. 3월 달 수업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이 수업에 떠들거나 잠을 자도 선생님이 해당 학생들을 엄격하게 지도하지 않는다. 크게 야단치지 않고 가볍게 주의만 줄 뿐이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이 떠들거나 잠을 자는 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그러한 학생들이 많아지다 보니 공부에 적극적인 의지가 있는 학생들도 수업에 더 이상 집중하기 힘든 상황까지 진행되고 말았다. 일부 학생들이 심각한 문제 행동을 해도 선생님은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면서 주의만 줄 뿐이었다. 하지만 선생님도 수업이 잘 진행되지 않아 질서 세우기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Y교사의 경우, 역할 모델상은 ‘아기 엄마’이다. 아기 엄마는 무조건적으로 자녀를 사랑해야 하고 깊은 애착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만약 Y 교사가 유치원 교사라면 좋은 교사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중학교 교사로서 과도한 친절은 오히려 학생 생활 지도에 있어서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발달 단계상 영유아기아 청소년기의 특징은 다르다. 청소년기 학생을 영유아기 학생처럼 대하면 오히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많은 ‘아줌마’ 선생님들이 학생을 학생으로 대하지 않고 엄마처럼 대하기도 한다. 일단 교사가 엄마처럼 학생들을 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교사와 엄마의 차이점이 있다. 교사는 학생들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대하지만 엄마는 자기 자녀에 대하여 주관적인 입장에서 대한다. 엄마처럼 학생 입장에서 생각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엄마처럼 대하는 것이 그 학생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S교사는 30대 중반인 싱글인 고등학교 사회과 여자 선생님이다. S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하고 수업 내내 늘 활력이 넘친다. 그래서 S선생님 주변에는 남학생들이 많이 따른다. 쉬는 시간에도 찾아와 상담을 많이 하고 선생님이 먼저 허물없이 농담을 걸기도 한다. 그런데 S선생님은 학급마다 특별히 좋아하는 남학생들이 있다. 이러한 남학생들의 공통점은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겼으며 공부도 잘하는 소위 말하는 모범생 ‘엄친아(엄마친구아들)’이다. 이러한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더 친절하게 대하고 적극적으로 학생들에게 스킨쉽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팔짱을 끼거나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툭툭 장난치기도 한다. 이러한 선생님의 행동에 대하여 학생들은 오히려 좋아한다.
S교사의 역할 모델상은 ‘또래 친구’ 내지 ‘애인’이다. 친구처럼 허물없이 친밀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때로는 교사와 학생과의 경계선이 분명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사와 학생이 쉬는 시간에는 학생이 농담이나 장난도 잘 치고, 편안한 상담도 잘 이루어지지만 정작 수업 시간에는 질서 세우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배움이 잘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수업 방해자들이 생기고 그들로 인하여 수업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 모범생을 자기 애인처럼 여기고 대하는 것은 교사의 윤리적인 문제가 될 수 있고, 학생들에게 편애하는 교사로 비난받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당 학생과의 관계가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오인받을 수 있다.
P교사는 30대 중반인 남자 선생님이다. 주변에서부터 성격이 좋다는 평가를 많이 받고 호감형인 선생님이다. 군대에서 ROTC 장교로 근무한 경험도 있다. 교직 초기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였다. 학생들도 젊은 남자 선생님을 잘 따르고 좋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일부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친구처럼 대하기도 하였다. 교사와 학생과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것같아 교사로서의 권위를 가지기 위해 학생들이 함부로 행동하면 의도적으로 엄하게 대하기 시작하였다. 군대 경험이 있었기에 학생들의 질서 세우기에 초점을 두고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학기 초부터 엄격하게 학생들을 지도하고 사소한 실수로 그냥 넘어가지 않고 강하게 압박하였다. 그랬더니 학생들도 선생님을 어렵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는 학생들도 사라졌다. 문제는 엄격한 분위기에서 수업이 진행되다보니 좋거나 딴 짓하는 학생은 없지만 무서워서 열심히 공부하는 척할 뿐 실제로는 선생님 눈치만 보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학생과의 관계도 깊어지지 않았다.
P교사의 역할 모델상은 ‘군대 조교’이다. 군대 조교의 모습은 엄격한 훈육 태도로 인하여 학생들의 질서를 잘 세워 나간다. 학생들은 이러한 선생님을 두려워하고 그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배움은 두려움과 함께 춤출 수 없다. 교사에 대한 두려움으로 조용히 앉아서 경청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겠지만 불안과 두려움은 배움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움을 멈추게 할 뿐이다.
O교사는 50대 초반 2학년 담임인 초등학교 여자 선생님이다. 승진을 포기한지 오래되었고 건강도 그리 좋지 않다. O교사의 관심사는 일단 학생들이 아니다. 가장 큰 관심사는 재테크와 자기 자녀 교육 문제이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사고없이 지내고 자기의 남은 정년 기간을 잘 채우길 바랄 뿐이다. 수업 시간에는 교과서 진도대로 수업을 할 뿐이고 교육과정 재구성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학생들에게 숙제를 많이 내주는 편이고 숙제 검사를 철저히 하고 숙제를 못한 학생들에게는 야단을 친다. 그래서 학생들은 선생님을 무서워한다. 체육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힘든 활동은 가급적 피한다. 혹시나 학생들이 안전 사고가 날까 걱정되기도 하고, 체육 수업을 하기에는 교사 자신도 체력적으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육 교과 전담 교사에게 맡기거나 불가피한 경우는 가급적 쉽게 체육 수업을 하려고 노력한다.
O교사의 역할 모델상은 ‘관리자’ 내지 ‘방관자’이다. 학생들의 안전 사고가 나지 않도록 관리하고 숙제를 잘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데 관심을 가진다. 학생들끼리 갈등이 일어나거나 마음의 상처가 있는 학생들을 대할 때 형식적으로 대하고 학생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깊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학생들과의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한다. 왜냐하면 복잡한 학생들의 문제로 인하여 자기도 고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한 거리 유지를 하면서 사고 없이 무사히 학년을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K교사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친다. 학생들로부터 수업을 잘하기로 유명한 교사이다. 일단 외모가 잘 생겼고, 유창한 언변을 가지고 있으며, 잘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선생님은 수업을 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K 선생님의 노력 중의 하나는 수학과 수업을 잘하는 선생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학과 수업 공개를 통해 관찰한 동료 교사들의 수업 모습은 별로 감동이 없었다. 일단 자기보다 수업을 잘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수업 방식도 일상의 수업과 공개 수업이 많이 달랐기에 별로 감동이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많이 수강하고 있는 인터넷 수능 특강 동영상을 시청하였다. 인강 수능 강사는 일단 화려한 언변에 쉬지 않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설명, 조금 지루할 때마다 등장하는 재미있는 농담 등을 통해 수강자로 하여금 빨려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도 저렇게 수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수업 준비시 교과서 내용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관련된 자습서, 문제지 등을 참고하여 PPT와 학습지 등 학습 자료를 만들어 수업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선생님이 아무리 강의를 잘해도 10분이 넘어가면 일부 학생들이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였고, 20분이 지나면 많은 학생들의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때 인강 강사처럼 재미있는 농담이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때로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노래 등을 불러주어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였다. 이때마다 학생들은 환호를 보였고 이러한 행동들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교과서 내용으로 돌아가면 일부 학생들은 현격하게 집중도가 떨어졌다.
K교사의 역할 모델상은 ‘인터넷 강의(인강) 강사’이다. 상당수의 많은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들이 인강 강사처럼 수업을 진행한다. 이렇게 수업하는 것을 좋은 일상의 수업 모델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인강 강사 모델의 한계는 재미있게 수업을 하지만 일방적인 정보 전달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설명식 수업에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고등학생의 경우, 최대 15-20분 내외이다. 그래서 인강은 짧은 시간으로 나누어 강좌를 개설하거나 강의 시간이 50분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학생이 집중도가 떨어지면 클릭하여 잠시 끊어서 쉴 수 있다. 인강은 학생의 이해 정도를 확인하지 않고 강사가 준비한 대로 수업을 진행한다. 만약 학생이 강사의 강의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한다면 다시 재생하여 반복하여 듣거나 그 강좌를 그만두고 난이도가 낮은 수준의 강좌를 선택하여 들으면 된다. 그런데 실제 수업은 인터넷 강의 환경과 크게 다르다. 실제 수업은 학생들의 배움 상태를 확인하면서 학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진행된다. 즉, 인강은 일방 통행이라면 실제 수업은 쌍방통행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수업을 인강처럼 일방 통행 방식으로 진행하면 일부 학생 중 그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하면 잠을 자거나 딴 짓을 할 수 밖에 없다. 가르침과 배움의 간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학교 교사가 교실에서 인터넷 강의 강사처럼 수업을 해서는 안된다. 절대로 인터넷 강의와 실제 수업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H교사는 40대 중반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다. 수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고 늘 최선을 다해 수업 준비를 한다. 그런데 H선생님 수업 방식은 다른 선생님들과는 많이 다르다. 일단 수업 시간에서 설명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핵심 개념을 제시할 때만 설명식 수업으로 진행하고 나머지 시간은 다양한 학습 활동을 전개한다. 학습 주제를 소개한 뒤 학생들이 교과서 내용을 훑어 읽기를 하도록 한다. 그리고 교과서 내용에서 지유롭게 질문을 뽑아내도록 한다. 코넬 노트 방식으로 교과서 내용을 요약하도록 하고 교사가 이를 확인하고 피드백한다. 어려운 단어와 개념을 따로 정리하면 교사가 이를 설명해 준다. 학습 과제를 제시하면 학생들은 개별 학습 내지 협동학습 방식으로 학습 과제를 수행하도록 한다. 모둠 활동시 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 교사가 먼저 개입하여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개별 활동이나 모둠 활동을 통해 나온 결과물을 학급 전체에서 발표하도록 한다. 교사는 학생 발표 내용을 중심으로 피드백하고 학생들이 놓치거나 오개념에 빠지기 쉬운 부분을 챙겨서 설명한다. 45분 수업 시간 중 교사가 설명식으로 이야기하거나 피드백하는 시간은 15분 내외 정도이고 나머지 시간들은 학생들이 자기주도적으로 학습 활동을 한다.
H 교사의 역할 모델상은 ‘학습 코치’이다. 학습 코치는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고 학습이 잘 일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학생이 학습의 주인공이고 교사는 학습의 조력자 내지 도움자이다. 학습 코치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학습의 촉진자의 역할을 한다.
지식의 전달자인가? 학습의 촉진자인가?
많은 교사들이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쓴다. 지식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지식의 전달자 모델은 몇 가지 전제가 숨어 있다.
객관적인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 이래 축적된 지식과 정보의 양이 엄청 많다. 학교에서는 그 모든 지식과 정보를 현실적으로 가르칠 수 없기에 그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핵심 지식을 찾아 추려야 한다. 그런데 핵심 지식과 주변 지식의 차이점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가르쳐야 할 지식이 구체적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학자와 교사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애매함이 존재한다.
지식의 전달자 모델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 일단 교사가 지식의 전문가로서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특히 초등학교 교사의 경우, 거의 모든 과목을 수업 시간에 가르쳐야 하는데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초등학생들의 질문이 초등학교 교육과정 수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사도 학생들의 모든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중등학교 교사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에서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여 국어 교사가 되었다 할지라도 자기가 자신이 있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다. 자기가 자신이 없는 부분을 가르치는 경우, 교사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교과서 학습 분량이 적으면 교사가 지식의 전달자 역할을 수행하기 쉽다. 그런데 교과서 책 분량은 얇을지 몰라도 실제 내용은 압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는 서구와 달리 참고서용 교과서가 아니라 요약용 교과서이기 때문에 교과서만 가지고는 학생들이 학습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 힘들다. 결국 교사가 교과서 내용을 압축된 학습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어야 하는데, 이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든다. 그러다보니 교사들이 진도 나가기에 급급한 경우가 생긴다. 특히 우리나라 인문계 고교의 경우, 중학교에 비해 지식의 분량이 3배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3년 과정의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소화하는 경우가 없다. 즉, 3년 과정을 2년 안에 소화해야 하고 고3 시기에 ebs 교재를 가지고 심화 복습하는 형태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압축된 지식, 엄청난 분량의 지식을 짧은 시간 안에 소화해야 하는 학생들이 이를 충분히 따라 가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시기에는 학습 격차가 그리 크지 않고 학습의 양도 그리 많지 않기에 짧은 시간 안에 따라 잡을 수 있지만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학습의 분량과 난이도가 높아지면서 학습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고등학생의 경우, 놀다가 열심히 공부하려고 노력해도 단기간에 따라잡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학생이 노력해도 성적이 오르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결국 학습 무기력에 빠지는 경우가 생긴다.
지식의 전달자 모델에서는 학생을 지식의 수용자로 이해한다. 학생을 백지처럼 이해한다. 교사가 쏟아내는 수많은 지식들을 학생들이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지식을 이해하고 기록하고 암기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데 일제 학습 방식에서 학생이 배움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은 시간적인 한계가 있다. 초등학생의 경우 5-10분, 중학생의 경우 15분, 고등학생의 경우 20분이 최대치이다. 그 시간을 초과하면 더 이상 집중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설명식 수업 시간이 길수록 가르침과 배움의 간극이 발생한다.
교사는 학습의 촉진자 모델을 선택할 수 있다. 학습의 촉진자(facilitator)란 교사가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여건과 상황을 마련하고 학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학습의 도움을 주고, 학습이 잘 이루어지면 칭찬과 격려를 통해 지속적인 학습 동기 유발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사가 일종의 학습 코치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학습의 촉진자 모델에서는 교과 지식보다 ‘역량’을 강조한다. 역량은 이론적 지식의 차원에서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실제의 세계에서 특정 맥락의 수행과 관련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말한다. 원래 역량은 직업 수행 능력을 말했으나 OECD DeSeCo 프로젝트 이후 오늘날 복잡한 삶에 대처하기 위한 광범위한 능력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OECD DeSeCo 프로젝트에서는 다양한 역량 중에서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 역량을 추출했는데 이를 핵심 역량이라고 불렀다. 핵심 역량은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에서의 상호 작용 능력’, ‘자율적인 행동 능력’, ‘여러 도구를 상호작용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역량이란 실제 삶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 자체보다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인 지혜를 보다 더 강조한다. 지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관적인 인식론 입장에 가깝고, 지식 그 자체보다는 지식을 가공하고 활용하고 새롭게 창출할 수 있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그러기에 지식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학습의 촉진자로서의 교사는 학생들의 질문에 대하여 즉문즉답(卽問卽答)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쉽게 얻은 지식은 쉽게 잊을 수 있지만 어렵게 얻은 지식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의 질문에 대하여 교사가 질문으로 반응을 하고 학생 스스로 해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습의 촉진자로서 교사가 학생들이 해답을 찾아가려고 할 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찾아가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학생이 세운 학습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점검하고 피드백하는 것이다. 교사는 수업을 통해 학생의 마음 속에 질문을 남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질문이 학생 마음 속에서 움직여서 학생이 스스로 해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학습의 촉진자로서 교사는 얼핏 보기에 수업 시간에 별로 하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학생들의 배움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행동한다. 즉, 가르침은 최소화되고 배움은 극대화된다.
학습의 촉진자 모델에서는 학생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즉, 학생의 자기 주도적 학습을 강조한다. 하지만 실제 학생들은 모두 학습 의지가 높지 않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더 많다. 그러기에 교사는 학생들의 흥미 유발에 적극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학습 수준에 맞게 학습에 몰입할 수 있도록 수업을 디자인해야 한다.
마중지봉(麻中之蓬)인가? 근묵자흑(近墨者黑)인가?
교직 생활에서도 역할 모델은 매우 중요하다. 교사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사의 역할 모델은 긍정적인 모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모델도 존재한다. 교사가 어떤 역할 모델을 자기 모델로 삼느냐에 따라 교직 생활 방식이 달라진다.
고사성어 중 ‘마중지봉(麻中之蓬)’이란 말이 있다. 삼밭 속의 쑥이라는 뜻으로, 곧은 삼밭 속에서 자란 쑥은 곧게 자라게 되는 것처럼 선한 사람과 사귀면 그 감화를 받아 자연히 선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에 반대되는 말로 근묵자흑(近墨者黑)이 있다.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나쁜 버릇에 물들기 쉬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고사성어의 공통점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역할 모델보다는 부정적인 역할 모델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역할 모델을 추구하면 자기가 사서 고생해야 하지만 부정적인 역할 모델은 자기의 욕망대로 살 수 있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데, 이때 학교 문화와 주변 교사가 누군가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자기 주변에 부정 방향의 동료 및 선배 교사들이 많으면 열정적인 교사도 쉽게 그들을 따라 부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예컨대, 담당 학년과 수업 시수를 적게 담당하려고 교사들끼리 갈등한다고 하자. 처음에 저경력 교사 입장에서는 담당 학년과 수업 시수로 갈등하는 것 자체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개 저경력 교사가 학교 문화상 힘든 학년을 담당하거나 수업 시수를 많이 맡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실제로 일을 하면서 저경력 교사들도 힘들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지만 힘들 때 주변 고경력 선배 교사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면 좋은 의도로 업무를 담당했지만 업무가 힘든 것은 힘든 것이고 자기 업무가 힘든 만큼 일종의 피해 의식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저경력 교사가 나중에 고경력 교사가 되어도 젊은 후배 교사 입장에서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기보다 자기가 당한대로(?) 그대로 후배 교사에게 대하려고 한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자기가 싫어했던 선배교사의 부정적인 모습이 어느덧 자기 모습이 되어 버린다. 마치 독재자와 오랫동안 싸웠던 민주화 투사가 시간이 지나자 자기가 싸웠던 독재자처럼 되고 만 경우와 비슷해지는 것이다.
나의 교사 역할 모델
나의 새내기 교사 시절을 되돌아보면 학교 안에서 내가 존경할만한 선배 교사는 없었다. 새내기 교사 시절 새로운 학습 도구 만들기 등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주변에 계시던 선배 교사들이 ‘나도 새내기 교사 시절에는 열심히 했어’라고만 말할 뿐 돕거나 격려준 사람은 없었다. 내가 보기에 수업을 열심히 준비하고 고민하는 선배 교사들을 찾아보기 힘들어 실망했다.
그런데 다행히 학교 밖 교사공동체에서 좋은 역할 모델을 만났다. 20-30대 교사 시절 나의 역할 모델이 되었던 분들은 손봉호 교수님, 송인수 선생님, 정병오 선생님, 김요셉 목사님 등이었다. 대학 시절 책으로만 접했던 손봉호 교수님을 졸업 이후 교사가 되어서 세미나 강의를 통해 만날 수 있었다. 그의 강의 내용도 탁월했지만 마음의 울림이 더 컸다. 여러 번 손봉호 교수님 강의를 들었지만 동일한 내용이라도 늘 새로운 감동과 여운이 있었다. 그 이유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말한 대로 현신된 삶을 살고 계셨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옳아도 메신저가 좋지 않으면 울림과 여운이 없다. 손봉호 교수님의 언행일치적 태도를 보면서 나도 손봉호 교수님처럼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좋은 역할 모델 중의 한 사람은 송인수 선생님이다. 송인수 선생님은 기윤실 교사모임이라는 교사 공동체에서 함께 만나 활동을 하였다. 송인수 선생님의 삶의 진정성, 탁월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비판적 사고력, 논리적 글쓰기 실력, 학생에 대한 애정, 최선을 다하는 수업 준비 모습 등에 늘 감동을 받았다. 송인수 선생님은 이후 좋은교사운동 대표를 역임하고 현재 사교육걱정없는 세상 대표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 다른 좋은 역할 모델은 정병오 선생님이다. 정병오 선생님도 기윤실 교사모임이라는 교사 공동체서 만나 오랫동안 함께 교사 운동을 했다. 정병오 선생님을 통해 시대 정신을 고민하는 것, 본질에 대한 통찰력과 고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 주변 사람들의 장점을 찾아 그에 맞는 리더쉽을 세워주기, 뛰어난 자기 성찰력 등을 배웠다. 정병오 선생님은 좋은교사운동 대표를 역임한 이후 현재 서울시교육청 주관 인생진로탐색학교인 오딧세이 학교에서 큰 역할을 하면서 후배 교사들을 섬기고 있다.
수업자로서 역할 모델은 김요셉 목사님이다. 김요셉 목사님은 MBTI 성격유형으로는 스파크 유형(ENFP)이고, 도형심리학 입장에서는 별(☆)형이다. 수업자로서 탁월한 강의 능력과 동기 유발, 유연하고 창의적인 강의를 하는 분이다. 교육대학원 강의를 통해 만났는데, 내 성격유형 및 교수유형과 비슷하여 나도 나중에 김요셉 목사님처럼 수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수업자로서 내 역할 모델이 되었다.
교사 역할 모델 문제에서 유의해야 할 것
교사 역할 모델을 선정하고 그 역할 모델을 따르고자 할 때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무엇보다 역할 모델의 대상인 사람을 절대화하여 우상(偶像)으로 삼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특정 인물을 역할 모델로 삼고 직접 교류하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매우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역할 모델의 대상을 우상화하는 순간 마음의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멀리서 보면 위대해 보이지만 가까에서 바라보면 실망스럽기 쉽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점도 있다. 훌륭한 사람일수록 장점의 위대함만큼 단점에 대한 실망감도 크다. 많은 사람들은 역할 모델의 단점으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역할 모델 인물의 인격과 윤리의 문제라기보다 역할 모델 인물을 자기가 우상화했기에 발생하는 문제일수 있다. 내 20대 시절 그러했다. 내가 존경했던 사람의 단점을 발견한 순간 그에 대한 존경심보다 더 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꼈다. 그에 대한 존경심이 클수록 실망감도 더 컸고, 심지어 그에 대한 증오감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인생의 경험이 쌓이면서 역할 모델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리고 역할 모델 대상의 장점과 단점을 분리하여 장점만 취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내 역할 모델 대상이 되었던 손봉호 교수님, 송인수 선생님, 정병오 선생님, 김요셉 목사님의 단점을 잘 알고 있다. 가까이에서 함께 했기에 일반 사람들이 모르는 그 분들의 큰 단점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단점들로 인하여 그 분들을 존경하는 내 마음이 변하지는 않는다.
대개 어떤 사람의 장점이 단점으로 연결된다. 왜냐하면 장점과 단점의 뿌리가 동일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서는 장점이었던 부분이 다른 경우에서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강력한 리더쉽과 추진력이 때로는 고집스러움으로 연결될 수 있고, 학문적 탁월성이 때로는 지적 교만함으로 연결될 수 있다. 비판적 사고력이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원만한 대인 관계와 포용력이 때로는 우유부단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단점을 없애려고 하면 장점도 함께 사라지는 경우가 생긴다.
무엇보다 우리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울 점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어린 아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즉,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함은 나이 많은 노인들도 배워야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새내기 교사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새내기 교사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순수함은 고경력 교사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심지어 부정 방향의 교사들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부정 방향의 교사들도 부정적인 단점들로만 이루어진 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경험했던 교장 선생님들 중 최악의 교장 선생님이 있었다. 모든 교사들이 그 교장 선생님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많은 교사들에게 상처주는 말을 많이 했고 교사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교장 선생님의 장점은 업무의 탁월함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교장 선생님 중에서 학교 업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업무 추진력이 탁월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도 그 교장 선생님이 부담스러웠지만 어느날 교장 선생님의 장점을 알게 되면서 그 장점만큼은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자기 주변에서 긍정적인 역할 모델을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부정적인 역할 모델에게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는다. 퇴행(退行)을 경험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교사가 성장하려면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역할 모델 인물을 찾아야 한다. 특히 사립학교에만 오랫동안 근무하는 경우, 외부의 인적 교류가 거의 없기에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가 쉽다. 자기가 속한 학교 안에서 찾기 힘들다면 학교 밖 교사공동체에 찾아가야 한다. 거기에서 자기가 성장할 수 있는 역할 모델을 찾고 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상호 교류를 해야 한다. 특히 저경력 교사 시절에는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 모델 인물을 멘토(mentor)로 삼고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교직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좋은 멘토를 가까이에서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은 교사로서 큰 축복 중의 하나이다. 저경력 교사의 미덕은 배움이지 리더쉽이 아니다.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새내기 교사 중 자기 세계에만 빠지고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한 교사들 중 지속적으로 의미있는 성장을 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개인의 탁월한 재능으로 인하여 리더가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무엇보다 자신이 누군가의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자기가 누군가에게 어떤 역할 모델이 되고 있는지 성찰할 수 있다면 대충 교직 생활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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