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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혁신

누구를 위한 고교 학점제인가?

by 김현섭 2021. 8. 18.

학교 교육과정을 디자인할 때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어떤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할 것인가 문제이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영재들이 많다면 영재 교육과정으로 구성해야 하고, 학교 부적응 학생이 많다면 부적응 학생들의 상황에 맞게 생활 중심 교육과정으로 구성해야 하고, 경계선 학생들이 많다면 특수 교육과정으로 구성해야 한다. 어찌보면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 학교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중하위권 학생들이 많은데 영재 교육과정으로 추구하여 운영하면 소수 엘리트 학생들에게는 도움이 되겠지만 대다수 중하위권 학생들은 불리하게 된다.

모든 학생들을 위한 교육, 공공성에 기초하여 교육과정을 구성한다면 다양한 학생들의 필요와 특성에 맞게 개인맞춤형 교육과정을 구성해야 한다. 원래 개인맞춤형 교육과정은 전근대적인 시대의 귀족 교육 방식이다. 귀족들 자녀들을 위한 개인 교사를 채용하여 맞춤형 교육을 실시했다. 근대사회에서는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공장식 학교에서 운영했다. 하지만 탈근대화된 사회에서는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개인의 특성과 요구에 맞추어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 미래형 학교가 필요하다. 즉, 상위권, 중위권, 하위권 학생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그에 맞는 개인 맞춤형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진학과 관련하여 수시 입학 희망자, 정시 입학 희망자, 사회진출자 등에 맞는 교육과정을 구성하여 운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과정이 현재보다 유연하고 다양해야 한다.

교육과정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이다. 즉,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장단점이 존재하는 선택의 문제이다. 완벽한 교육과정은 존재하지 않고, 교육과정 유형에 따라 장단점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좋고 나쁜 교육과정보다는 우리에게 잘맞는 교육과정인가 잘 맞지 않은 교육과정인가의 문제이다. 그래서 어떤 학교의 교육과정이 좋다고 해서 우리 학교에서 이를 그대로 똑같이 적용한다고 해서 동일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학교에 맞는 교육과정을 디자인하려면 교육과정에 대한 연구, 우리 학교 학생에 대한 연구, 교사들의 철학과 역량, 지역 사회와 현 시대의 필요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구성해야 한다.

최근 고교 학점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는 2025년에 전국적인 전면 도입이 예정되어 있고, 경기도의 경우, 2022년까지 전면 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고교 학점제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고교 학점제가 지향하는 개인맞춤형 교육과정에 대하여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고교 학점제가 현장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시간표 관리 문제와 공강 시간 문제, 소인수 과목 문제, 교사 수급 문제, 교사 역량 및 다교과 지도 문제, 교실 공간 및 예산 문제, 공동 교육과정 운영시 발생할 수 있는 생활지도, 교통 안전 문제, 작은 학교, 소인수 학교의 불리함, 정시 확대 등 입시 제도와의 충돌 문제 등등의 현실적인 숙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방향은 좋아도 현실적인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천천히 도입하자는 의견이 있을 수 있고, 다소 시행착오가 있어도 추진하면서 문제점을 해결하자는 입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고교 학점제의 핵심은 다양한 학생들의 관심사, 성적, 진로 등의 고려하여 개인 맞춤형 교육과정을 디자인하여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서 의미있는 배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대학 선이수 과목이나 심화과목을 수강할 수 있도록 하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기초 과목, 실용 과목을 수강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교육과정상 상위권 학생들을 위해 중하위권 학생들이 희생되는 일이 없애야 하고, 중하위권 학생들로 인하여 상위권 학생들이 불리한 상황에 놓이지 않아야 한다. 수시 전형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정시 시 전형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수능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대학 미진학 학생들은 사회 진출에 필요한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고교 학점제의 핵심은 선택과목의 수를 늘이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필요와 특성에 맞게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것이다. 고교 학점제를 잘 운영하려면 현재 교육과정보다 학생들에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은 과목을 개설하여 학교에서 감당이 잘 되지 않거나 각 강좌의 수준이 떨어진다면 이것도 문제가 될 것이다.   

고교 학점제는 절대선이 아니다. 학점제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해서 모든 학교가 학점제를 운영한다고 다 좋은 학교라고 말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모든 대학은 학점제로 운영되고 있지만 모든 대학이 다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점제는 선택형 교육과정을 위한 일종의 도구요, 방법이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선택형 교육과정인가에 따라 학교마다 운영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고교 학점제는 입시를 위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예컨대, 국영수 비중을 늘이고, 입시 과목에 대한 반복 학습을 위한 편법적 수단으로 사용하고, 다인수 학급을 편성하여 상위권 학생들에게 유리하게 운영할 수 있다. 진로 중심인가, 진학 중심인가, 입시 중심인가, 미래역량 중심인가에 따라 학점제는 학교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운영될 수 있다. 예컨대, 경기 이우고등학교는 진로 중심 고교 학점제를 운영하고 있고, 충남 삼성고등학교는 진학 중심 고교 학점제를 운영하고 있고, 충남 별무리고교는 미래핵심역량 중심 고교 학점제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교 학점제가 도입 취지에 맞게 개인 맞춤형 교육과정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려면 고교 학점제의 철학과 방향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해야 한다. 학점제 운영 방식은 학생 학습 수준, 학교 규모, 교사 역량, 학부모의 요구, 학교 자원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백교백색의 모습을 보이겠지만 학점제의 철학과 방향성은 분명하게 정리하여 제시해야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학교 홍보시 모든 학생을 위한 고교 학점제를 운영하겠다고 이야기를 해서 이를 믿고 학교를 입학했는데, 실제로는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유리한 형태로 교육과정이 운영되고 있다면 학생들은 학교를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학교의 철학과 가치는 무엇이고 이를 교육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는지 이야기해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잘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외식을 할 때 식당에서 음식 재료의 원산지를 미리 밝혀서 소비자가 이를 숙지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학교가 주로 어떤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지 명료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교사가 곧 교육과정이다. 교육과정을 잘 구성하고, 교재도 잘 제작했다 하더라도 교사의 수준과 역량이 뒷받침하지 못하면 교육과정의 효과를 온전히 기대할 수 없다. 교사가 교육과정을 직접 디자인을 하면 그 과정에서 교육과정에 대한 전문성과 기획력이 신장된다. 개인지성에 근거한 교육과정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수준 차이가 벌어질 수 있겠지만 집단지성에 근거한 교육과정은 개별 교사의 수준을 뛰어넘어 안정적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

고교 학점제에서도 교사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교사가 다교과 지도를 할려면 지식전달자 역할을 넘어 학습코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역량과 기술이 필요하다. 과목명은 그럴듯하지만 실제 수업은 자습만 한다면 결과적으로 학생과 학부모를 우롱하는 것이다. 학습코치와 자습감독자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고교 학점제를 잘 구성하고 다양한 선택형 과목을 학교에서 개설했다 하더라도 교사의 역량과 수업의 질이 떨어진다면 오히려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불만으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교육과정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잘 운영되려면 교실 공간과 시설이라는 하드웨어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교사의 역량과 학생의 역량이라는 휴먼웨어에 의하여 성공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